써먹을 수 없음에 대하여

써먹을 수 없음에 대하여

독서모임에서 이런 질문이 나왔다. 카뮈와 밀란 쿤데라는 무의미를 추구했고, 축의 시대 사상가들은 대부분 의미를 잘 찾는 방법을 말했는데, 각자는 무의미와 의미 중 어느 쪽을 더 추구하는가.

전제가 틀렸다고 생각했다. 카뮈는 무의미를 추구하지 않았다. 그는 세계의 무의미를 직시했을 뿐이다. <시지프 신화>의 결론은 오히려 정반대다. 무의미한 세계에서 자살하지 않고, 체념하지도 않고, 반항하며 살아가는 것. 시지프가 바위를 밀어 올리는 그 행위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출발점만 다를 뿐, "그럼에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카뮈는 축의 시대 사상가들과 의외로 같은 편이다.

쿤데라는 결이 좀 다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나 <무의미의 축제>에서 그가 말하는 무의미는 허무가 아니라 무게로부터의 해방에 가깝다. 니체의 영원회귀라는 무거움에 대한 반대급부로서의 가벼움. 그 가벼움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가볍다는 역설이 쿤데라의 핵심이다. 그는 의미를 거부한 게 아니라, 의미와 무의미의 이분법 바깥으로 나가려 했다.

그러니 질문을 다시 놓으면 세 갈래가 된다. 의미는 세계에 내장되어 있다고 보고 그것을 발견하려는 입장―아트만, 로고스, 도―이 있다. 세계는 무의미하지만 인간이 의미를 만든다고 보는 입장―카뮈의 반항, 사르트르의 기투―이 있다. 그리고 의미와 무의미의 이분법 자체를 풀어헤치려는 입장―쿤데라, 어떤 면에서는 장자―이 있다.

세 입장은 역사적 순서로 이어진다. 축의 시대 → 신의 죽음과 부조리 → 부조리조차 너무 비장하다는 반성으로서의 유희. 뒤로 갈수록 가벼워지고, 뒤로 갈수록 불안해진다.

어느 쪽이 맞느냐고 누가 물으면 나는 2번과 3번 사이 어디쯤이라고 답할 것이다. 우주에 의미가 내장되어 있다고 믿기에는 근거가 약하다. 반항의 비장함은 존경스럽지만 지치고, 때로 자의식 과잉처럼 느껴진다. 쿤데라의 진동에 끌리는 이유는 그것이 실제로 살아지는 방식에 가깝기 때문이다. 아침에는 의미를 만들려 애쓰고 저녁에는 그 모든 게 우습게 느껴지고, 다시 새벽에 무언가를 진지하게 믿고. 그 사이를 왕복하는 것.

그런데 여기까지 쓰고 나니 김현이 떠오른다.

1977년 김현은 이렇게 썼다. 문학은 써먹을 수 없다.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줄 수 없고 추운 사람에게 옷을 줄 수 없다. 그런데 바로 그 써먹을 수 없음이 문학의 쓸모다. 문학은 당장 쓸모가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쓸모로 환원하려는 도구적 이성에 저항할 수 있다. 억압하는 것들을 억압하는 힘이다.

김현은 앞서 말한 세 입장을 기묘하게 횡단한다.

한편으로 그는 카뮈적이다. 세계의 부조리에 맞선 반항으로서의 글쓰기. 4·19 세대가 유신 체제 안에서 쓴 문장이니 당연하다. "억압하는 것을 억압한다"는 구절은 수사가 아니라 정치적 선언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쿤데라적이다. 김현은 독재에 저항하면서도 참여문학 진영의 정렬 요구 또한 거부했다. 70~80년대 한국에서 "문학이 써먹혀야 한다"고 주장한 쪽은 오히려 민중문학이었다. 문학이 혁명에 복무해야 한다, 민중의 삶을 변혁하는 도구여야 한다. 이것은 축의 시대적 정렬 모델의 현대 정치 버전이다. 역사의 법칙에 문학을 정렬시키는 것. 김현은 이 정렬 요구에도 저항했다. 문학이 혁명에 복무하는 순간 그것도 또 하나의 써먹음이 된다는 것이 그의 직관이었다.

의미를 만들되 그 의미를 고정된 목적에 봉헌하지 않는 것. 이것이 김현의 자리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앞서 잠정적으로 착지했던 자리―의미를 진지하게 만들되 절대화하지 않는 거리두기―와 거의 같은 구조를 가진다. 독서모임에서 출발해 카뮈를 거쳐 쿤데라를 지나온 생각이 결국 한국의 평론가 한 사람에게 도착한다.

출판이라는 일을 하면서 김현의 문장을 자주 떠올린다. 출판은 써먹음의 논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책은 팔려야 하고 매출은 나야 한다. 숫자는 실재한다. 그러나 동시에 출판에는 당장 써먹을 수 없는 책들이 있다. 공공 도메인 문학 전집, 팔릴지 알 수 없는 철학 번역서, 시집. 편집자는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주의에 완전히 환원되지 않는 상품을 만드는 기묘한 위치에 서 있다. 이 위치가 유지될 때만 출판이라는 일이 진짜 출판일 수 있다는 생각을, 김현은 50년 전에 이미 해두었다.

무의미와 의미 중 어느 쪽을 추구하느냐. 그 이분법 자체가 너무 좁다. 세계에 내장된 의미를 발견할 수도 있고, 무의미한 세계에서 의미를 만들 수도 있고, 의미와 무의미 사이에서 진동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중요한 것은 그 의미가 무엇에 봉헌되지 않느냐다. 시장에, 이데올로기에, 당장의 쓸모에 봉헌되지 않는 의미만이 자기 자신일 수 있다.

써먹을 수 없음에 대하여. 이것은 문학에 대한 명제이기도 하고, 편집자에 대한 명제이기도 하고, 어쩌면 한 사람의 삶에 대한 명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