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지 않는 것의 그리움 - Saudade
다니던 초등학교가 보이는 아파트에 살게 된 적이 있다. 스물다섯, 친구 둘과 함께였다. 복도에 나가면 운동장이 보였다. 낮에는 아이들이 뛰어다녔고, 저녁이면 조명 없는 운동장은 어둠 속에 가라앉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초등학교 시절이 딱히 행복하지 않았다. 잘 어울리지 못했던 기억이 더 많다. 그런데 밤마다 운동장을 내려다보면, 무언가가 가슴 한쪽을 눌렀다. 그리움이라고 부르기엔 그리워할 것이 없었다.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때의 내가 더 이상 없다는 것, 그 사실 자체가 아팠다.
사우다지(saudade). ‘사-우-다-지’로 읽는다. 라틴어 sōlitātem, 즉 ‘고독’에서 왔다. 직역하면 그리움이지만, 그리움과는 결이 다르다. 포르투갈의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는 이렇게 썼다. “사우다지란 이것이다. 부재의 존재.” 없는 것이 있는 것. 사라진 것이 여전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감각. 사우다지는 그런 단어다.
노스탤지어가 과거의 달콤함을 향한다면, 사우다지는 더 쓸쓸한 곳을 가리킨다.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 존재했으나 돌아올 수 없는 것, 심지어 존재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것을 향한 갈망. 포르투갈어에는 “사우다지를 죽인다(matar saudades)“는 표현이 있다. 그리운 사람을 다시 만났을 때, 그리운 것을 다시 했을 때 쓴다. 하지만 진짜 사우다지는 죽일 수 없다. 돌아갈 수 없는 것을 향한 그리움에는 도착지가 없기 때문이다.
이 단어가 태어난 토양을 이해하려면, 15세기 포르투갈의 부두를 상상해야 한다. 대항해시대. 남자들은 배에 올랐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항구에 남았다. 돌아오지 않는 배가 많았다. 난파했는지, 전사했는지, 그저 돌아오지 않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기다리는 사람들은 슬픔도 분노도 체념도 아닌 감정 속에 살았다. 대서양이라는 거대한 장벽 너머로 사라진 사람을 향한, 끝나지 않는 그리움. 그것이 사우다지의 원형이다.
포르투갈의 국민 음악 파두(fado)는 사우다지를 노래하기 위해 존재하는 장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두의 어원은 라틴어 fatum, ‘운명’이라는 뜻이다. 리스본 뒷골목의 선술집에서 태어난 이 음악은, 한 사람의 가수가 기타 반주에 맞춰 운명과 상실과 그리움을 노래한다. 2011년 유네스코는 파두를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파두의 여왕이라 불린 아말리아 호드리게스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파두를 부르지 않는다. 파두가 내 안에서 부른다.” 검은 숄을 두른 채 고개를 뒤로 젖히고 노래하던 그녀는, 1999년 세상을 떠났을 때 포르투갈 전역을 3일간 애도에 잠기게 했다. 수십만 명이 장례식에 모였고, 그녀의 유해는 포르투갈 국립 판테온에 안치되었다. 가수의 죽음이 아니라 감정 하나가 육체를 잃은 것 같았다고,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한국에도 비슷한 감정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그리움’이라 부르고, 때로는 ‘향수’라 부른다. 하지만 한국어의 그리움은 대상이 명확하다. 고향이 그립다, 어머니가 그립다, 옛 연인이 그립다. 주어와 목적어가 분명한 감정이다.
사우다지는 다르다. 목적어가 흐릿하다. 무엇이 그리운지 정확히 말할 수 없는 그리움. 이를테면 스물다섯에 창밖으로 초등학교 운동장을 내려다보며 느꼈던 그것. 행복하지 않았던 시절인데도 아린 그것. 한국어로는 “뭔가 아련하다” 정도가 가장 가까울 텐데, ‘아련하다’는 시각적 흐릿함에 기대는 말이지 감정 그 자체를 이름 붙이는 말은 아니다.
한국 사회는 그리움을 잘 허락하지 않는다. 과거를 그리워하면 “앞을 봐라”고 한다. 지나간 것에 연연하면 “미련을 버려라”고 한다. 우리에게 그리움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지, 머물러도 되는 감정이 아니다. 포르투갈 사람들이 “사우다지를 느끼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말할 때, 한국인의 귀에는 조금 이상하게 들린다. 좋은 것이 사라져서 아픈 건데, 왜 그 아픔이 좋다는 걸까.
편집자로 일하면서 비슷한 것을 느낀 적이 있다. 원고의 초고를 읽을 때가 가장 좋다. 거칠고, 두서없고, 자신감에 차 있거나 반대로 불안에 가득 찬 초고. 퇴고를 거듭할수록 글은 나아지지만, 초고에 있던 무모한 에너지는 사라진다. 완성된 원고를 인쇄소에 넘기고 나면, 가끔 초고의 그 서투른 문장들이 떠오른다. 더 나은 버전이 존재하는데도 이전 버전을 그리워하는 마음. 이것도 일종의 사우다지일 것이다.
어쩌면 사우다지는 시간이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는 사실에 대한 인간의 가장 정직한 반응인지 모른다.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그 사실을 안다. 그래서 그립다.
초등학교 앞 친구의 집에서 2년쯤 살다가 본가로 돌아왔다. 이사한 뒤에는 운동장이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으니까 생각도 줄었다. 그런데 가끔, 아주 가끔, 밤에 아무 운동장이나 지나갈 때면 그 창문이 떠오른다. 어두운 운동장을 내려다보던 스물다섯의 밤. 그리워할 것이 없는데도 가슴이 아렸던 그 이상한 감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