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덧없음 - Mono no aware

사물의 덧없음 - Mono no aware

종로의 한 이자카야였다. 카운터석 여섯 자리뿐인 가게. 친구가 대구로 내려가기 사흘 전이었다. 십 년 넘게 서울에 살았던 그가, 결국 고향 근처로 돌아가기로 했다.

평소처럼 사케를 시켰다. 평소처럼 사시미를 시켰고, 평소처럼 마지막에 오차즈케를 시켰다. 모든 것이 평소와 똑같았다. 그런데 그날따라 젓가락 끝에 닿는 생선의 결, 잔에 얼음이 녹으며 내는 소리, 주인장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건네는 접시의 각도까지 이상할 정도로 또렷했다.

평소였다면 흘려보냈을 것들이었다. 평소였다면 대화에 집중하느라 보이지도 않았을 것들이었다. 다음 주에도, 그다음 주에도 다시 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은 아니었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이 자리가 언젠가 "마지막"이 될 것을 선명하게 알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앎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간장 종지의 무늬, 친구의 웃음 끝에 살짝 남는 주름, 창밖으로 스치는 퇴근길 사람들의 실루엣. 평범한 풍경이 돌연 아름다워졌다. 정확히 말하면, 아름다움과 슬픔이 구별되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일본어에 이 상태를 위한 단어가 있다. 모노노아와레(物の哀れ). 직역하면 '사물의 슬픔'. 더 정확히는 '사물이 품은 덧없음을 느끼는 마음'. 어떤 번역자는 '사물에 대한 애잔함'이라 옮기고, 어떤 번역자는 '무상(無常)에 대한 미학적 감수성'이라 옮긴다. 둘 다 맞고, 둘 다 부족하다.

あはれ(아와레)는 원래 감탄사였다. '아' 하고 터져 나오는 소리.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아름다움 앞에서도 나오는 그 소리. 시간이 흐르며 이 단어는 점점 '슬픔' 쪽으로 기울었다.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담던 그릇이, 슬픔 쪽에만 물이 남은 것이다.

그러나 완전히 슬픔만은 아니다. 모노노아와레의 슬픔은 아름다움과 뗄 수 없다. 아름답기 때문에 슬프고, 슬프기 때문에 아름다운 상태. 이 복합적인 감정을 하나의 단어로 묶어둔 것이 일본어의 재주다.

이 개념을 학문적으로 정립한 사람은 에도 시대의 국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다. 18세기의 일이다. 노리나가는 『겐지모노가타리』를 파고들다가, 이 11세기 헤이안 시대의 소설을 관통하는 하나의 정서가 있다고 보았다. 그것이 모노노아와레였다. 사랑이 찾아오고 떠나가고, 권력이 쥐어지고 놓이고, 꽃이 피고 지는 모든 장면에, 인물들은 그저 '아와레'라고 탄식한다. 그 탄식이 이 작품의 본체라고 노리나가는 주장했다.

흥미로운 건 노리나가가 이 감수성을 중국에서 들어온 유교적·불교적 세계관과 구별하려 했다는 점이다. 그는 중국식 사유를 '가라고코로(漢心)'라 부르며 경계했다. 덧없음 앞에서 교훈을 끌어내거나, 무상을 깨달음의 계기로 삼는 것은 '가라고코로'다. 그저 덧없음 앞에서 '아' 하고 느끼는 것, 거기에 머무르는 것이 일본 고유의 정서라고 그는 보았다.

이 감정이 가장 선명하게 응축된 장면이 벚꽃이다. 일본인들이 하나미(花見)를 하며 벚꽃 아래 모이는 이유. 소메이요시노 품종은 일 년에 단 닷새에서 열흘만 핀다. 한 주가 지나면 꽃잎이 바닥을 덮는다. 사람들은 그것을 알기 때문에 나무 아래 앉는다. 영원히 필 꽃이었다면 아무도 그토록 오래 올려다보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어에 '덧없다'가 있다.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결이 다르다.

한국어의 '덧없다'는 대개 허무 쪽으로 기운다. "인생 덧없다"고 말할 때, 우리는 허망함을 말한다. 의미 없음을, 헛됨을 말한다. 그 뒤에는 대개 체념이나 한숨이 따라온다.

모노노아와레는 그렇지 않다. 덧없음을 알지만 체념하지 않는다. 허망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 덧없음을 '아름다움의 조건'으로 받아들인다. 짧기 때문에 귀하다.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지금 눈부시다. 이 감정에는 허무가 없다. 대신 일종의 경건함이 있다.

우리 문화에도 이 감각이 있긴 하다. '아쉽다'라는 말이 그나마 가깝다. 하지만 아쉽다는 약하다. 너무 일상적이다. 이자카야 카운터에서 친구와 마주 앉아 느끼던 그 감각을 "아쉽다"로 번역하는 건, 산수화를 크레파스로 다시 그리는 것과 같다.

한국인의 그리움은 대체로 '지나간 것'을 향한다. 돌아가고 싶은 시절,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 이미 사라진 장면. 사우다지와 히라에스가 그런 결이다. 과거형의 그리움.

그런데 모노노아와레는 현재형이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을 향해 이미 그리워하는 감정이다. 미래의 상실을 현재로 당겨와 느끼는 이 정서를, 한국어는 단일한 단어로 잡아두지 않았다.

왜일까. 어쩌면 우리는 너무 오래 '버티는 민족'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라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는 여유보다, 사라지지 않게 붙잡거나 사라진 뒤에 기리는 방식을 택해왔는지도 모른다. 종묘의 제례가 그렇고, 제사가 그렇다. 우리는 떠난 것을 불러들이는 문화였지, 떠날 것을 배웅하는 문화는 아니었다.

카운터석에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친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이 특별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특별하다고 말하는 순간, 그 특별함이 증발할 것 같았다. 우리는 평소처럼 헤어졌다. "가라", "또 보자." 그리고 나는 집으로 걸어오는 내내, 지하철 손잡이의 차가움과 창밖으로 흐르는 간판들의 색깔을 이상하게 오래 들여다보았다.

며칠 뒤 친구는 떠났고, 나는 그 이자카야에 아직 다시 가지 않았다. 언젠가 다시 갈 것이다. 그때는 평범한 저녁이 될 것이고, 간장 종지의 무늬는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