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tost - 자기 비참함의 자각
누군가의 좋은 소식을 듣고 기뻐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될 때가 있다.
인스타그램을 보다가 손가락이 멈춘다. 비슷한 나이, 비슷한 시기에 시작한 사람의 게시물. 승진, 합격, 계약, 론칭. 무엇이든 좋다. 겸손한 듯 쓴 캡션에 숫자는 빠지지 않는다. 축하 댓글이 줄줄이 달려 있다.
좋아요를 누르지 않는다. 댓글도 달지 않는다. 그냥 피드를 넘긴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천장을 올려다본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기분이 가라앉았다.
질투일까. 한국어로는 '배 아프다'고 한다. 남이 잘되면 배가 아프다. 표현 자체가 솔직하다. 그런데 이건 질투가 아니다. 그 사람이 밉지 않다. 그 사람의 성공이 부당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잘될 만한 사람이 잘된 것이다. 머리로는 안다.
질투는 방향이 있다. 상대를 향한다. 상대가 가진 걸 내가 갖고 싶거나, 상대가 가진 걸 상대가 잃었으면 하는 마음. 그런데 지금 이 감정은 상대를 향하지 않는다. 피드를 넘긴 뒤 불편한 건 상대가 아니라 나 자신이다.
그러면 자괴감일까. 좀 더 가깝다. 스스로를 괴롭히는 마음. 나는 뭘 하고 있나, 나는 왜 저만큼 못 하나, 나는 왜 여기 있나. 자괴감은 조용하다. 안으로 가라앉는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싶게 만든다.
그런데 이 감정에는 자괴감에 없는 것이 하나 있다. 날이 서 있다. 가라앉으면서 동시에 어딘가를 향해 날을 세운다. 누구를 향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 사람을 향한 건지, 세상을 향한 건지, 아니면 이런 감정을 느끼는 자기 자신을 향한 건지. 분명한 건, 자괴감은 이렇게 뾰족하지 않다는 것이다.
체코어에 이 감정의 이름이 있다. 리토스트(lítost, '리-토스트'로 읽는다).
밀란 쿤데라가 『웃음과 망각의 책』에서 이 단어에 한 장을 통째로 바쳤다. 소설 속에서 한 학생이 여자친구와 수영을 한다. 여자친구가 훨씬 빠르게 헤엄친다. 학생은 자신의 초라함을 자각한다. 둑 위를 걸어 돌아가는 길에, 그녀의 뺨을 때린다.
쿤데라는 이 감정을 2행정 엔진에 비유했다. 1행정, 괴로움. 자기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갑자기 마주쳤을 때 밀려오는 고통. 2행정, 복수. 그 고통을 누군가에게 전가하고 싶은 충동. 질투도 아니고 자괴감도 아닌, 그 둘을 한꺼번에 품은 감정. 그게 리토스트다.
어원이 이 이중성을 증명한다. 동사 리토바트(litovat)는 '후회하다'인데, 같은 뿌리의 형용사 리티(lítý)는 '사나운'이라는 뜻이다. 후회와 분노가 한 몸이다. 고대 체코어에서 이 단어는 '격노하다'와 '가엽게 여기다'를 동시에 품었다.
쿤데라는 리토스트가 젊은 자의 장식품이라고 썼다. 경험이 쌓이면 자기 비참함에 무뎌진다고.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매주 베스트셀러 순위를 본다. 비슷한 시기에 시작한 곳이 몇만 부를 찍었다는 소식이 피드에 뜰 때마다, 6년 차인 나는 여전히 쪼그라든다.
쿤데라의 학생은 뺨을 때렸다. 리토스트의 2행정이 밖으로 터진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리토스트는 대부분 터지지 않는다. 좋아요도 누르지 않고, 댓글도 달지 않고, 피드를 넘긴다. 그리고 혼자 천장을 본다. 말하는 순간 자신의 초라함을 인정해야 하니까. 2행정 엔진의 회전이 밖이 아니라 안을 향한다. 터뜨리지 않고 삼킨다. 그게 한국식 리토스트다.
최근 추천 알고리즘이 타인의 성과를 끊임없이 보여주는 현상을 가리켜 '프로파일 리토스트'라는 말이 생겼다. 쿤데라가 이 단어를 쓴 건 1979년이었다.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에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자기 비참함을 목격하는 일에서 인간은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질투가 아니고, 자괴감도 아니고, 그 둘을 꿰뚫고 남는 것. 이 감정에 이름이 있다는 걸 안다고 해서 다음번 피드를 넘길 때 달라지는 건 없다. 다만, 천장을 올려다보는 그 시간이 조금은 덜 외로울 수 있다. 체코의 어느 소설가가 이미 그 천장을 다녀갔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