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tsugi - 금으로 잇는 상처
편집자의 일은 지우는 것이다.
오탈자를 지우고, 비문을 지우고, 불필요한 문장을 지운다. 표지의 미세한 색상 차이를 잡고, 판형의 밀리미터 단위 어긋남을 교정한다. 완성된 책은 매끄러워야 한다. 이음새가 보이면 안 된다. 독자가 편집의 흔적을 의식하는 순간, 편집은 실패한 것이다.
5년 동안 이 일을 하면서 체득한 미학이 있다. 결함은 숨겨야 한다. 과정은 보이지 않아야 한다. 완성품만이 세상에 나갈 자격이 있다.
그런데 일본에는 정반대의 철학이 있다.
킨츠기(kintsugi, 金継ぎ). ‘킨’은 금, ‘츠기’는 잇다. 금으로 잇기. 깨진 도자기를 옻칠과 금가루로 수리하는 기법이다. 핵심은 이것이다. 깨진 자리를 감추지 않는다. 오히려 금으로 빛나게 만든다.
균열이 그릇의 역사가 된다. 금빛 선이 지나간 자리가, 이 그릇이 한때 깨졌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리고 그 사실이 그릇을 더 아름답게 만든다.
15세기 무로마치 시대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아끼던 중국산 청자 찻잔이 깨졌다. 대체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중국에 보내 수리를 맡겼는데, 돌아온 찻잔에는 금속 꺾쇠가 박혀 있었다. 금이 간 자리를 쇠로 꿰맨 모양. 기능적으로는 수리가 됐지만, 추했다. 마치 상처에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인 것 같았다.
요시마사는 장인들에게 명했다. 더 아름다운 방법을 찾으라. 그렇게 옻칠에 금가루를 섞어 균열을 메우는 기법이 태어났다. 수리인데, 장식이 됐다. 깨진 찻잔이 깨지기 전보다 더 가치 있는 물건이 됐다. 균열의 자리를 따라 흐르는 금빛 선이, 이 그릇만의 유일무이한 무늬가 된 것이다.
킨츠기는 일본 다도(茶道)와 함께 발전했다. 16세기 차(茶)의 대가 센노 리큐는 완벽하고 화려한 찻잔보다 거칠고 비대칭적인 찻잔을 선호했다. 균열이 있는 그릇, 유약이 고르지 않은 그릇, 시간의 흔적이 남은 그릇. 그는 그것들에서 아름다움을 봤다.
이것이 와비사비(wabi-sabi)의 미학이다. 불완전함, 불영속성, 미완결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것. 완벽한 대칭보다 어긋난 형태에서, 새것보다 닳은 것에서, 화려함보다 소박함에서 깊이를 읽는 감각.
킨츠기는 와비사비의 가장 구체적인 실천이다. 깨진 것을 버리지 않고, 깨진 그대로를 품고, 거기에 금을 입힌다.
일본어에 무신(無心, mushin)이라는 개념도 있다. ‘마음이 없는 상태’. 변화와 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뜻한다. 킨츠기에는 이 무신이 깔려 있다. 깨졌다는 사실에 집착하지 않고, 깨진 뒤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 그 수용 위에 금을 얹는 것.
현대에 킨츠기가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이유는 수리 기법 때문이 아니다. 은유 때문이다.
SNS 시대, 사람들은 자신의 균열을 숨기는 데 익숙하다. 필터를 씌우고, 편집하고, 하이라이트만 보여준다. 이력서에는 성공만 적고, 실패는 빈칸으로 남긴다. 깨진 적 없는 사람처럼 보여야 기회가 온다. 킨츠기는 그 반대를 제안한다. 균열을 금으로 드러내라.
2020년, 팬데믹으로 세계가 멈췄을 때 킨츠기 워크숍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다. 물리적으로 무언가를 깨고 다시 붙이는 행위가, 심리적 회복의 은유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치료와 상담 현장에서도 킨츠기 철학이 활용되고 있다.
일본에서 대지진이 일어날 때마다, 장인들이 무료로 킨츠기 수리를 제공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깨진 그릇을 고치는 것은 깨진 일상을 고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한국에서 깨진 그릇은 버린다.
물론 어디서나 깨진 그릇은 대부분 버려진다. 하지만 한국에서 ‘깨지다’라는 말이 갖는 뉘앙스는 유독 부정적이다. 관계가 깨지고, 이미지가 깨지고, 계획이 깨진다. 깨진 것은 복구 대상이기 전에 실패의 증거다.
한국 사회에서 결함을 드러내는 것은 위험하다. 이력서에 공백기를 적으면 불리하고, 사업 실패 경험을 말하면 신뢰가 깎인다. ‘흠 없는’ 것이 가치의 기본값이다. 스펙, 외모, 경력 — 모든 영역에서 매끄러움이 경쟁력이 되는 사회.
성형수술 후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이 최고의 칭찬인 나라. 자연스럽다는 건 수술 흔적이 안 보인다는 뜻이다. 고친 자리를 감추는 게 기술이다. 킨츠기는 정반대다. 고친 자리를 금으로 빛낸다.
편집자로서 나도 같은 논리로 살아왔다. 책의 결함을 지우는 것이 내 일이고, 출판사의 결함을 지우는 것이 내 마케팅이었다. 초기의 허술함을 가릴 번듯한 포장을 밤새 고민하던 날들이 있었다.
그런데 가끔 생각한다. 완벽하게 매끄러운 책이 좋은 책인가. 독자가 기억하는 문장은 오히려 완벽하지 않은 문장이 아닌가. 매끄러움 사이로 삐져나온 날것의 감정, 다듬어지지 않은 고백. 편집의 그물을 빠져나간 문장이 독자의 가슴에 박히는 순간들.
킨츠기의 장인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처음에는 금으로 화려하게 장식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고. 일부러 더 많은 균열을 만들고 싶어진다고. 하지만 그렇게 만든 킨츠기는 아름답지 않다. 그릇이 주인공이고, 금은 조연이다. 균열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균열이 있었다는 사실을 고요히 인정하는 것.
드러내되 과시하지 않는다. 이것이 킨츠기와 단순한 ‘상처 자랑’의 차이다.
한국어에 ‘흠’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 단어는 거의 항상 ‘없어야 할 것’의 자리에 놓인다. 흠잡을 데 없는 사람, 흠 없는 기록, 나무랄 데 없는 인품. 흠은 제거 대상이다. 일본어에서 킨츠기가 ‘금으로 잇다’라면, 한국어의 흠은 ‘메꾸다’ 또는 ‘지우다’와 짝을 이룬다.
킨츠기는 흠에 금을 입힌다. 흠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흠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존중하는 것이다. 깨진 적 없는 그릇과 깨졌다가 금으로 이어진 그릇 중, 어느 쪽이 더 깊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가.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이 원고도 깨질 것이다. 퇴고 과정에서 문장이 부서지고, 구조가 무너지고, 때로는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할 것이다. 이미 여러 번 그랬다. 이 책의 2장은 초고를 전부 버리고 새로 썼다. 편집자인 내가 저자가 되어보니, 이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비로소 안다.
다만 그 균열의 자리에 금을 입힐 수 있다면. 고쳐 쓴 흔적이 부끄러움이 아니라 이 글의 역사가 될 수 있다면.
깨진 찻잔이 깨지기 전보다 아름다울 수 있다면, 깨진 원고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