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lsarikännit - 속옷 차림의 자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있었다. 그 시간을 견딜 수 없어서 핸드폰을 집었고, 핸드폰을 집은 자신이 싫어서 다시 내려놓았다. 내려놓은 핸드폰이 다시 손에 들려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건, 그 어려운 일을 가능하게 해주는 단어 하나일지도 모른다.
Kalsarikännit
속옷 차림의 자유
그 주는 유독 사람을 많이 만났다.
월요일 저자 미팅, 화요일 거래처 점심, 수요일 대학 동기 술자리, 목요일 콘텐츠 파트너 미팅. 금요일까지 약속이 잡혀 있었는데, 목요일 밤에 나는 금요일 약속을 취소했다. 그리고 토요일과 일요일의 빈칸을 일부러 비워두었다.
토요일 오후.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 트레이닝 바지를 갈아입을 생각도 없었다.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따고, 소파에 누워 넷플릭스를 켰다. 뭘 볼지 고르다가 결국 아무것도 고르지 못하고 캔만 비웠다.
이상한 건, 그 순간 떠오른 감정이 편안함이 아니라 죄책감이었다는 것이다. 스물아홉에, 토요일 오후에, 혼자 맥주를 마시고 있다. 인스타그램을 열면 누군가는 카페에, 누군가는 전시에, 누군가는 한강에 있다. 나는 소파에 있다.
핀란드에는 이 상태를 위한 단어가 있다.
칼사리캔닛(kalsarikännit). '칼-사-리-캔-닛'으로 읽는다. 칼사리(kalsari)는 속옷, 캔닛(kännit)은 취기. 합치면 '속옷 차림으로 취하기'. 집에서, 편한 옷차림으로 술을 마시되 외출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다.
파티의 시작도 끝도 집이다. 칼사리라는 말 자체가 스웨덴어 칼송에르(kalsonger)에서 왔는데, 핀란드인들은 이 외래어를 자국의 생활 문화와 결합해 완전히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냈다.
처음 이 단어를 발견한 건 해외 출판 트렌드를 조사하던 중이었다. 2018년에 미스카 란타넨이라는 핀란드 저널리스트가 이 단어 하나로 책을 냈다. Päntsdrunk: The Finnish Path to Relaxation.
부제가 걸작이다. '집에서, 혼자, 속옷 바람으로 마시기'. 출판 편집자로서 이 부제를 보는 순간 두 가지를 동시에 느꼈다. 이걸 책으로 만들었다는 대담함에 대한 감탄, 그리고 이걸 왜 내가 먼저 못 만들었나 하는 아쉬움.
중요한 건 이 단어에 부정적 뉘앙스가 없다는 점이다. 칼사리캔닛은 자조가 아니라 선언이다. 오늘, 나는 아무 데도 가지 않겠다는 적극적인 결정. 소파 위의 자기 결정권.
이 단어가 핀란드에서 태어난 건 우연이 아니다.
헬싱키의 동짓날, 해는 아침 아홉 시 반에 떠서 오후 세 시 십오 분에 진다. 여섯 시간이 채 안 되는 낮. 나머지 열여덟 시간은 어둠이다.
북부 라플란드로 올라가면 아예 해가 뜨지 않는 극야가 두 달 가까이 이어진다. 이런 나라에서 '오늘 밤 나갈까 말까'를 고민하는 건 사치에 가깝다. 바깥은 영하 15도, 어둠은 오후 세 시에 시작된다.
핀란드 인구 약 550만 명에 사우나가 300만 개다. 집마다 하나씩 있다는 뜻이다. 핀란드인의 일상은 극단의 교차로 이루어져 있다. 뜨거운 사우나에서 얼음물로 뛰어들고, 끝없는 어둠과 백야의 여름 사이를 견딘다.
세계에서 인구 대비 헤비메탈 밴드가 가장 많은 나라이기도 하다. 어둠을 부정하지 않고 음악으로 끌어안는 사람들. 이들에게 쉼은 나약함이 아니다. 극단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기술이다.
2015년, 핀란드 외교부는 세계 최초로 국가 공식 이모지 56개를 발표했다. 칼사리캔닛이 당당히 포함되어 있다. 안락의자에 앉아 속옷 바람으로 맥주를 마시는 남자, 와인을 마시는 여자.
외교부가, 국가의 얼굴을 세계에 보여주는 공식 기관이, 이 단어를 자국 문화의 상징으로 내세웠다. 시카고 트리뷴이 보도했고, 보그가 기사를 썼고, 뉴욕 매거진이 주목했다. 핀란드는 웃으면서 말했다. 이게 우리입니다.
핀란드는 유엔 세계행복보고서에서 8년 연속 1위를 차지한 나라다. 가장 행복한 나라가 '속옷 차림으로 혼자 마시기'에 전용 단어를 가지고 있다는 것.
행복 연구자 프랑크 마르텔라는 핀란드인의 행복 비결이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기대를 낮추고, 부정적 감정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태도. 행복은 밖에서 찾는 게 아니라, 소파 위에서 자기 자신에게 허락하는 것일 수 있다.
2020년, 팬데믹으로 전 세계가 집에 갇혔을 때, 이 단어는 갑자기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뉴욕 타임스는 미국인들도 핀란드식 음주를 시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다만 속옷 대신 트레이닝 바지를 입었다고.
한국에서 토요일 오후에 집에 있다고 말하면 돌아오는 반응은 대부분 비슷하다.
'왜? 무슨 일 있어?' 또는 '피곤한가 보다.' 한국어에는 '혼술'이라는 단어가 있다. 혼자 마시는 술. 2010년대 중반부터 쓰이기 시작해서 이제는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올라 있다. 칼사리캔닛과 비슷해 보이지만, 결정적 차이가 있다.
혼술에는 아직 해명의 그림자가 남아 있다. '혼술도 괜찮아'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그것이 괜찮지 않을 수 있다는 전제가 깔린다. 혼술을 '인정'해야 하는 사회. 그 인정을 구하는 콘텐츠가 넘쳐나는 사회.
유튜브에서 '혼술 브이로그'를 검색하면 수만 개의 영상이 뜬다. 예쁜 조명, 감성 음악, 정성스러운 안주. 혼술조차 보여주기의 대상이 되는 나라. 칼사리캔닛에는 그런 연출이 없다. 핀란드어에서 이 단어는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냥 삶의 한 장면이다.
생각해보면 한국에서 '쉼'은 언제나 조건부였다. 쉬려면 이유가 있어야 했다. 아프거나, 지쳤거나, 이번 주가 특별히 힘들었거나. 내 경우에도 그랬다. 일주일 내내 사람을 만났으니까 쉬어도 된다고, 나 자신에게 사유서를 제출하고 있었다.
출판사를 운영하면서는 더하다. 쉬는 시간에도 원고를 읽어야 '프로'고, 주말에도 트렌드를 조사해야 '열정적'이다. 대표라는 타이틀이 주는 무게는, 소파 위에서도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한국어에는 '눈치'라는 단어가 있고, 이 책의 뒷부분에서 따로 다루겠지만, 눈치의 무게는 쉼의 영역에도 작동한다. 남들이 일하는데 나만 쉬면 불안하다. 남들이 만나는데 나만 집에 있으면 불안하다.
카카오톡 프로필에 '바쁨'을 상태 메시지로 올려놓는 나라. 바빠야 안심이 되는 나라. 우리에게는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허락하는 단어가 아직 없다.
토요일 오후의 소파로 돌아간다.
만약 그때 이 단어를 알았다면, 죄책감 대신 다른 감정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캔맥주를 따는 '칙' 소리에 얹을 수 있는 이름. 트레이닝 바지 차림에 부여할 수 있는 격식.
핀란드 외교부도 인정한 공식적 삶의 방식이라고, 나 자신에게 말할 수 있는 구실.
물론 구실이 있든 없든, 맥주 맛은 같았을 것이다. 다만 기분은 조금 달랐을 것이다. 이름이 붙은 감정은, 이름이 없는 감정보다 가볍다.
오늘, 당신의 소파 위에는 어떤 단어가 놓여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