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갈 수 없는 고향 - Hiraeth

돌아갈 수 없는 고향 - Hiraeth

노르웨이 어딘가, 바닷가 절벽 위에 집이 한 채 있다. 나무로 지어진 집이다. 창문이 크고, 창밖으로 바다가 보인다. 안에는 벽난로가 있다. 밖은 춥다. 안은 따뜻하다. 나는 그 집 안에 있다. 혼자이거나, 좋아하는 사람과 둘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파도 소리가 들린다. 해야 할 일은 없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다.

이 집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이 장면을 자주 떠올렸다. 성인이 되고 방향을 잡지 못하던 시절, ‘언젠가 이런 삶을 살겠다’는 막연한 그림이 있었다. 구체적인 계획은 아니었다. 바다, 절벽, 벽난로, 고요함. 그게 전부였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인데, 이상하게 그곳이 내가 돌아가야 할 장소처럼 느껴졌다.

회사를 차리고, 책을 내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삶은 그 그림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서울의 좁은 사무실, 마감에 쫓기는 밤, 카카오톡 알림이 끊이지 않는 하루. 그런데 이상하게도, 바쁜 날의 끝에 눈을 감으면 그 절벽 위의 집이 여전히 거기 있었다. 더 선명하게.

웨일스어에 이 감정을 정확히 가리키는 단어가 있다.

히라이스(hiraeth). ‘히르-아이스’로 읽는다. 어원은 웨일스어 hir(길다)와 aeth(고통, 슬픔). 직역하면 ‘긴 고통’ 또는 ‘긴 그리움’이다.

돌아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갈망, 혹은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는 고향에 대한 갈망. 영어의 homesickness가 가장 가까운 번역이지만, 작가 파멜라 페트로의 표현을 빌리면 그건 원목과 합판의 차이다.

앞 장에서 다룬 사우다지와도 닮아있다. 둘 다 부재를 향한 그리움이다. 하지만 결이 다르다. 사우다지가 시간 속으로 사라진 것을 향한다면, 히라이스는 장소를 향한다. 더 정확히는, 한 번도 발을 딛지 못한 장소를 향한다. 존재하지 않는 고향, 상상 속에서만 완벽한 그곳. 사우다지에 파도 소리가 있다면, 히라이스에는 안개가 있다.

이 단어가 태어난 땅의 역사를 알면, 그것이 왜 장소의 감정인지 이해할 수 있다.

웨일스는 1282년 잉글랜드에 정복당했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식민지 중 하나다. Wales라는 이름 자체가 앵글로색슨어로 ‘이방인의 땅’이라는 뜻이다. 자기 땅에서 이방인이 된 사람들. 웨일스인들은 스스로를 킴루(Cymru), ‘동포의 땅’이라 불렀지만, 세계는 정복자가 붙인 이름으로 그들을 불렀다. 자기 고향의 이름조차 빼앗긴 것이다.

1847년, 영국 정부는 웨일스 교육 실태 조사 보고서를 발표했다. 웨일스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잉글랜드 출신 조사관 세 명이 작성한 보고서였다. 웨일스어를 낙후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웨일스 사람들의 도덕성까지 비하했다.

웨일스인들은 이것을 ’푸른 책의 배반(Brad y Llyfrau Gleision)’이라 부른다. 이후 학교에서 웨일스어를 쓰면 벌을 받았다. 아이들 목에 나무 팻말을 걸었다. 모국어가 수치가 된 것이다.

언어를 빼앗기면 고향을 잃는다. 물리적으로 같은 땅에 서 있어도, 그 땅의 이름을 자기 말로 부를 수 없다면, 그곳은 이미 다른 곳이다.

히라이스는 이 역사 위에서 자랐다. 존재하되 사라진 고향, 발을 딛고 있으되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향한 그리움. 웨일스인들에게 히라이스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정체성 그 자체다.

포르투갈에서 사우다지가 파두라는 음악이 되었듯, 웨일스에서 히라이스는 시와 노래와 문학이 되었다. 감정이 문화가 되고, 문화가 저항이 된 경우다.

그래서일까. 웨일스에는 히라이스와 짝을 이루는 또 하나의 단어가 있다. 쿠네빈(cynefin).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에서 집에 온 것 같은 느낌’이라는 뜻이다.

미국 뉴저지에서 자란 작가 파멜라 페트로는 웨스트 웨일스에 처음 도착했을 때 이 감각을 느꼈다고 썼다. 나무 한 그루 없는 언덕 위에서 지평선까지 뻗어나가는 대지를 보며, 태어나서 처음 집에 왔다고 느꼈다고. 고향이 아닌 곳에서 고향을 발견하는 경험. 히라이스의 거울 같은 단어다.

한국어에는 ‘고향’이라는 단어가 있다. 단단하고 따뜻한 단어다. 하지만 한국어의 고향은 구체적이다. 태어난 곳, 자란 곳, 설날에 돌아가는 곳. 주소가 있는 고향이다.

‘금의환향’이라는 사자성어가 보여주듯, 한국에서 고향은 떠나는 곳이자 성공해서 돌아가는 곳이다. 출발점이며 동시에 도착점. 그래서 고향에는 늘 성공과 실패의 무게가 실린다.

히라이스가 가리키는 고향은 그런 곳이 아니다. 주소가 없다. 좌표가 없다. 지도에 표시할 수 없다. 다만 마음 어딘가에 그 풍경이 있고, 거기에 가면 모든 것이 괜찮을 것 같은 막연한 확신만 있다.

한국 사람들도 이것을 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름이 없을 뿐이다.

명절 고향길에서 느끼는 건 기쁨보다 피로인 경우가 많다. 막상 도착하면 돌아가고 싶은 건 고향이 아니라 서울의 원룸이다. 실제 고향은 복잡하고 피곤하다. 그래서 ‘진짜 고향’은 실제 주소가 아닌 다른 어딘가에 있다는 걸 감각적으로 안다.

SNS에 ‘여기가 내 진짜 집인 것 같다’고 쓰는 사람들이 많다. 제주도 한 달 살기, 포르투갈 이민 꿈, 일본 시골 카페 사진을 저장하는 사람들. 그들이 찾고 있는 것은 구체적인 장소가 아니다. 히라이스의 대상이다. 도착하면 사라질 신기루, 그러나 그리워하는 동안은 진짜인 곳.

나는 노르웨이의 그 집에 가본 적이 없다. 아마 앞으로도 가지 않을 것이다. 가면 실망할 거라는 걸 안다. 벽난로는 관리가 귀찮을 것이고, 바닷바람은 창문 틈으로 들어올 것이고, 고요함은 이틀이면 무료해질 것이다. 실제의 장소는 상상의 장소를 이길 수 없다.

하지만 괜찮다. 히라이스는 도착하기 위한 감정이 아니니까. 도착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리워하는 것, 그것이 히라이스다. 웨일스 사람들은 이 감정을 수백 년 동안 끌어안고 살았다. 잃어버린 언어, 빼앗긴 이름,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안고서도 정체성을 지켰다.

어쩌면 우리에게도 그런 집이 하나쯤 필요한 건지 모른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아도 좋은, 다만 떠올리는 것만으로 잠시 숨을 쉴 수 있는 장소.

나는 가끔 눈을 감고 그 절벽 위의 집을 찾아간다. 창밖에 바다가 있고, 벽난로가 타고 있고, 밖은 춥고 안은 따뜻하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이 고향처럼 느껴지는 이 감각에, 웨일스 사람들은 이미 이름을 붙여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