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이후의 번역》 : 좋은 번역이란 무엇이며, AI는 번역을 어떻게 바꾸는가

목차

PART I. 좋은 번역이란 무엇인가 - 번역의 본질을 다시 묻다

1장. 우리는 왜 아직도 ‘좋은 번역’을 설명하지 못하는가

2장. 번역을 언어 문제로 보는 순간, 모든 것이 어긋난다

3장. 번역은 선택의 연쇄다 ― 판단의 순간들

4장. 좋은 번역의 세 가지 조건

  1) 불가피성

  2) 위험의 동등성

  3) 해석적 도달점의 일치

5장. 번역가는 누구의 편에 서 있는가

PART II. AI 번역은 번역을 어떻게 끝내는가 - 기계 번역 이후의 세계

6장. AI 번역은 왜 ‘너무 잘’ 되는가

7장. AI가 제거한 것은 오류가 아니다

8장. 판단 이전의 텍스트

9장. 인간 번역가는 사라지지 않는다

PART III. 번역 이후의 번역 - 책임은 어디로 가는가

10장. AI 시대의 좋은 번역

11장. 번역의 권력과 거버넌스

12장. 우리는 무엇을 번역할 것인가


서문 - 번역은 언제나 이미 끝났다고 말해져 왔다

번역은 늘 위기에 처해 있었다. 새로운 언어가 등장할 때마다, 새로운 기술이 나타날 때마다, 번역은 곧 사라질 것처럼 이야기되었다. 활자가 필사를 대체했을 때도, 인쇄기가 원본을 복제했을 때도, 그리고 지금 인공지능이 문장을 생성하는 이 순간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번역은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다. 다만 언제나 그 정의가 바뀌어 왔을 뿐이다.

이 책은 “AI 번역이 인간 번역을 대체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그 질문은 이미 번역을 기술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 이 책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좋은 번역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그 질문에 진지하게 답해본 적이 있는가.

지금까지 번역은 주로 정확성과 자연스러움, 혹은 직역과 의역이라는 기준으로 평가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기준은 번역 결과를 분류할 수는 있어도, 번역이 실제로 무엇을 하는 행위인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번역은 단어를 옮기는 작업이 아니며, 의미를 복제하는 기술도 아니다. 번역은 언제나 선택과 포기의 연쇄로 이루어져 왔다. 그리고 그 선택의 순간마다, 누군가는 판단을 내려야 했다.

이 책은 바로 그 판단의 순간에 주목한다. 좋은 번역이란 원문을 최대한 보존한 결과물이 아니라, 원문이 감수했던 의미의 긴장과 위험을 목표 언어에서 다시 떠안은 번역이다. 다시 말해, 번역의 질은 정확성으로 측정되지 않는다. 번역이 어디까지 책임졌는가로 측정된다.

AI 번역의 등장은 이 문제를 더 이상 회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인공지능은 번역을 빠르고 유창하게 만들어주었지만, 동시에 번역에서 판단과 책임을 제거했다. AI 번역이 만들어내는 문장은 대부분 무난하고 안전하다. 그러나 바로 그 점에서, 그것은 번역의 결과라기보다 판단 이전의 상태에 가깝다. 책임질 주체가 부재한 번역은, 더 이상 누군가의 말이라고 부르기 어렵다.

이 책은 AI 번역을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AI 번역이 무엇을 가능하게 했고, 무엇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는지를 차분히 분석한다. 그리고 인간 번역의 역할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이동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앞으로의 번역가는 문장을 생산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디에서 판단이 필요한지를 설계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번역 이후의 번역》은 번역가만을 위한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출판인에게는 저작권과 저자성의 문제를, AI 개발자에게는 책임과 거버넌스의 문제를, 그리고 독자에게는 우리가 어떤 말을 믿고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번역은 더 이상 언어의 문제가 아니다. 번역은 판단과 책임의 문제다.

이 책이 그 질문을 다시 시작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