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 Dive] 기술은 늙지만, 품격은 늙지 않는다

[Deep Dive] 기술은 늙지만, 품격은 늙지 않는다

Prologue. 소란스러운 승부의 세계, 그 뒤편의 침묵

지금 대한민국은 <흑백요리사> 열풍입니다. 셰프들은 계급장을 떼고 서로의 목을 겨눕니다. 화려한 기술, 자극적인 맛, 그리고 승패의 짜릿함에 대중은 열광합니다.

하지만 이 소란스러운 전쟁터 밖, 승패를 초월한 경지에서 묵묵히 웍을 돌리는 단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방송에 나온 백수저 셰프들조차 사석에서는 옷깃을 여미며 "감히 평가할 수 없는 분"이라 칭송하는 사람.

신라호텔 '팔선(八仙)'의 전설이자, 현 '호빈(豪賓)'의 마스터 셰프. 후덕죽(侯德竹) 상무입니다.

이 리포트는 요리사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평생을 한 가지 일에 바친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업(業)의 끝', 그리고 우리가 잃어버린 진짜 어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Chapter 1. [Presence] 리더십은 등(Back)에서 나온다

1. 42년의 개근, 그리고 '주방 상무'

그는 삼성그룹 역사상 최초의 주방장 출신 상무였습니다. 보통 임원이 되면 펜을 잡고 결재를 합니다. 골프를 치러 다니고, 대외 활동에 주력합니다. 그것이 '성공한 삶'의 문법이니까요.

하지만 후덕죽은 달랐습니다. 그는 상무가 된 이후에도, 정년퇴임하는 날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조리복을 입고 주방에 섰습니다.

2. "나는 관리자가 아니다. 요리사다."

그가 인터뷰에서 남긴 말은 리더의 본질을 관통합니다.

"후배들이 땀 흘리며 불 앞에 있는데, 내가 어떻게 에어컨 바람 쐬며 사무실에 앉아 있나. 내 자리는 여기(주방)다."

그는 지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겪는 사람이기를 자처했습니다. 후배들은 그의 화려한 직함이 아니라, 그의 땀에 젖은 등을 보고 따랐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시원한 사무실입니까, 아니면 치열한 현장입니까? 진짜 권위는 직위(Position)가 아니라 현장감(Presence)에서 나옵니다.

Chapter 2. [Innovation] 모두가 돌을 던질 때, 본질을 보다

1. 1987년, '불도장' 사건의 전말

지금은 익숙한 보양식 '불도장(佛跳牆)'. 1987년 그가 이 메뉴를 처음 한국에 들여왔을 때, 반응은 칭찬이 아니라 비난이었습니다.

  • 종교계의 항의: "스님이 담장을 넘는다는 이름이 불경하다"며 조계종의 거센 항의를 받았습니다.
  • 사치 논란: 당시 짜장면 600원 시대에 9만 원이 넘는 가격은 언론의 먹잇감이었습니다. 사회적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2. 타협하지 않는 고집

호텔 경영진조차 난색을 보였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최고의 재료로 최고의 맛을 보여주는 것이 요리사의 의무다. 이름이나 가격은 그다음 문제다."

그는 직접 스님들을 찾아가 "맛의 지극한 경지를 표현한 것일 뿐 비하 의도가 아니다"라고 설득했고, 결국 불도장을 한국 중식의 상징으로 만들어냈습니다. 그의 고집 덕분에 한국 중식은 '배달 음식'의 이미지를 벗고 '파인 다이닝(Fine Dining)'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혁신가는 필연적으로 외롭습니다. 대중의 눈높이를 맞추는 건 '장사꾼'이지만, 대중의 눈높이를 끌어올리는 건 '장인(Master)'입니다.


Chapter 3. [Respect] 기술을 가르치는 스승, 태도를 가르치는 어른

1. 실수를 대하는 태도

여경래, 유방녕 등 당대의 대가들이 그를 '사부' 혹은 '큰 형님'으로 모시는 이유는 요리 실력 때문만이 아닙니다. 후덕죽 마스터는 후배가 치명적인 실수를 해도, 절대 손님이나 다른 직원들 앞에서 면박을 주지 않았습니다. 모든 상황이 종료된 후, 조용히 불러 나직하게 조언했습니다.

"아까 그 부분은 이렇게 잡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래도 고생했다."

2. 공(功)은 돌리고 과(過)는 가져간다

신라호텔 '팔선'이 세계적인 레스토랑이 되었을 때, 그는 모든 공을 "잘 따라와 준 후배들 덕분"이라고 돌렸습니다. 반면, 문제가 생기면 제일 먼저 앞으로 나와 고개를 숙였습니다. 책임은 무겁게, 영광은 가볍게 여기는 태도. 이것이 '어른의 품격'입니다.


Chapter 4. [Ageless] 나이는 숫자가 아니라 숙련도다

1. 70세의 이적생

2022년, 그는 42년간 몸담은 신라호텔을 떠납니다. 모두가 "이제 은퇴해서 편히 쉬시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앰배서더 서울 풀만 호텔'행을 택했습니다. 리모델링을 마치고 재개관하는 유서 깊은 호텔의 중식당 '호빈(豪賓)'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수락한 것입니다.

2. "아직 만들고 싶은 맛이 있다"

일흔이 훌쩍 넘은 나이. 명예도 돈도 이미 충분합니다. 그럼에도 그가 다시 뜨거운 불 앞으로 돌아간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요리사로서 아직 못다 한 숙제가 있어서." 그에게 은퇴란 없습니다. 오직 다음 요리만 있을 뿐입니다.

늙음은 주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호기심의 부재에서 옵니다. 내일 할 일이 기대되는 사람은 영원히 늙지 않습니다.


Epilogue. 기술(Skill) 너머의 클래스(Class)

AI가 레시피를 1초 만에 생성하고, 로봇 팔이 일정한 속도로 면을 뽑는 시대입니다. 기술의 영역에서 인간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40년 동안 매일 새벽 식재료를 검수하는 성실함, 자신보다 후배를 더 빛나게 하는 배려, 비난을 감수하고 본질을 지키는 용기는 데이터로 학습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흑백요리사>를 보며, 그리고 후덕죽이라는 이름 앞에서 숙연해지는 이유는, 우리 시대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진짜 어른'의 모습을 그에게서 보았기 때문일 겁니다.

기술은 늙습니다. 하지만 품격은 늙지 않습니다.

당신은 기술자입니까, 아니면 장인입니까?


본 리포트는 후덕죽 마스터 셰프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인사이트 콘텐츠입니다.